여행, 혹은 여행처럼
정혜윤
문학동네 난다
반양장본 | 284쪽 | 200*140mm
ISBN 9788954615600
우리 아버지는 가난뱅이였기 때문에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하염없이 먼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런데 그가 걸은 길은 삼한 시대 유서 깊은 수로의 폐허였다. 수치심 때문에 우울하고 말이 없던 그는 돌맹이, 잡초, 말라비털어진 땅, 버려진 것들, 쓸모없는 것들, 땅에 비친 그림자와 구름이 지나간 흔적 등과 친구가 되었다. 적나라한 가난 속의 소년이 한낮 폐허의 아름다움을 읽었다.
한낮의 폐허와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고된 노동 중에도 의연했다. 그 길을 몇 년 동안 걷는 사이 그의 꿈은 버려진 수로에 다시 물이 흐르게 하는 것이었다. 아빠,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요? 라고 내가 묻자 아빠는 아주 겸연쩍어하며 "폐허에 물이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던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32쪽
나도... 물어볼껄. 그 밤에 물어볼껄. 어렸지만 그래도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껄.
나도 한번은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어릴적 꿈, 놀이, 생각.